티스토리 뷰

© 2017 - Disney/Marvel

 

 

 

할리우드가 달라지고 있다.

세계의 변화에 발맞추어 영화계도 변화하고 있다고 해야 하나.

요즘 나오는 블록버스터 영화들에서 엿보이는 '주인공 서사'의 트렌드가 심상치 않다.

점점 더 세분화되고 다원화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우리가 이야기를 만들고 받아들이는 방식도 그에 맞게 변형되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포스트 모더니즘 세계의 해체적 특성에 맞게 우리 인간들·호모 사피엔스의 의식 수준이 점점 변화하고 있는 것일 수도.

 

- 혹시나 영화들을 보지 않은 사람들에겐 아래 글에 스포일러가 가득함을 미리 밝혀둡니다.

 

 

 

'<로그 원: 스타워즈 스토리> /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 /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 2 / <블레이드러너 2049> / '로 보는 할리우드의 탈중심화 트렌드

 

우리가 영화로 체득해 왔던 익숙한 '영웅 서사'는 그 틀이 거의 바뀌지 않고 오랜 시간 지속되어 왔다.

'고귀한 혈통을 지니고 있는 주인공에게 어떤 불운이 닥치고, 계속되는 시련과 난관을 극복한 끝에 위기에 빠진 세상을 구하고 자신도 내적으로 성장한다'는 전형적인 스토리.

세계 각국의 영웅 설화에서 비롯된 이런 이야기 원형은 관객이 가장 잘 이해할 수 있고 쉽게 공감할 수 있는 틀이다.극장에서 우리는 현실의 비루함을 잊고 자기만의 세계에서 '영웅'이 되는 것을 상상한다. 내게도 그럴듯한 기회와 행운이 주어지면 멋지게 날아오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21세기(더 정확히 말하면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런 트렌드에 변화의 조짐이 생기고 있다.

이제는 [해리 포터]나 [반지의 제왕]같은 진지한 판타지가 관객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못한다. 사람들은 그런 전형적인 서사를 식상해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20세기 중반 냉전 시대 이후로 세계를 지배해 온 자유 민주주의(자본주의), 신자유주의가 고착화되면서 세계 곳곳에서 폐해가 드러나기 시작했고 그로 인한 부작용이 일어나고 있는 시점이다. 금융 시스템에 대한 회의가 생기고 있고 사회 민주주의와 극단적 우파 민족주의가 함께 득세하고 있다. 전통의 제조업 기업들이 몰락하는 대신 FANG을 중심으로 한 정보통신 기업들의 주가가 연일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 미국과 서유럽이 주도해온 세계 질서 역시 중국의 부상으로 인해 균열의 조짐이 보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전통적인 '선악 구분'은 의미가 없어진다.

우리가 흔히 말하곤 했던 착한 놈과 나쁜 놈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것이다. 사실 6,70년대 아메리칸 뉴 시네마의 발흥 이후 미국 영화들에서부터 이런 경향이 엿보이긴 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작가적 개성이 강한 소규모 예술 영화에 국한되었을 때의 이야기일 뿐, 스필버그와 루카스가 주도해 온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업계에서는 여전히 전통적 영웅 서사가 득세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미국 정신의 대표적 프로파간다(수출품)로 여겨져 왔던 할리우드 상업영화의 서사에서도 탈중심화의 경향이 엿보인다.

 

 

© 2016 - Lucasfilm Ltd. All Rights Reserved.

 

 

<로그 원: 스타워즈 스토리>는 그 시작점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다. 지난 몇 십년간 미국인의 대체 역사로까지 추앙받아 온 <스타 워즈>시리즈의 스핀오프인 이 작품은 충격적인 결말로 시대 변화를 징후적으로 반영한다. 여태껏 보지 못했던 블록버스터 작법이 등장하는데, 그건 바로 '새드 엔딩'이다. 악당뿐만 아니라, 남녀 주인공 모두 희생시키는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비극적이면서 숭고한 희생 서사를 완성시킨다.

또한 반란군 대 제국군 구도는 명백히 2차대전 때의 레지스탕스 대 추축국의 구도를 연상시킨다. 전쟁의 거대한 승리 뒤에는 이름모를 개개인의 위대한 희생이 있었다는 감동이 이부분에서 생겨난다. 승리의 서사, 해피 엔딩을 기대했던 관객에겐 일종의 작은 반전이다.

 

이런 흐름은 라이언 존슨의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에서도 발견된다. 전편에서 J. J. 에이브럼스가 떡밥처럼 남겨놓은 주인공 '레이'에 관한 미스테리는 일정 정도 이 작품에서 밝혀진다. '라이언 존슨 감독이 시도한 포스의 민주화'라는 김혜리 기자의 평처럼, 이 작품 역시 과감하게 '선택받은 아이'의 서사를 탈피한다. 레이는 제다이의 딸이 아니고 고귀한 가문의 후손도 아니다.

레이는 그냥 레이다. 

이 또한 전통적 할리우드 작법에서 벗어난 시도이고 대자본 블록버스터로서는 극히 이례적인 사례다. 위에 서술했듯이 이는 세계의 탈중심화와 밀접히 연관된다. 역사는 거시 서사뿐만 아니라 미시 서사도 다뤄야만 한다.

부역자의 딸인 레지스탕스 스파이 요원 진 어소(<로그 원>)와 초라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마지막 제다이 레이. 두 편의 스타워즈 영화는 남성이 아니라 여성을 주인공으로, 영웅 서사를 폐기했음에도 박스오피스에서 나쁘지 않은 성과를 올렸다. 이는 할리우드 제작자들이 앞으로 숙고해볼 만한 여지를 남긴다.

 

마블의 유쾌한 스페이스 오페라인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 2>역시 마찬가지다.

"씨를 뿌렸다고 해서 아버지는 아니지.. 잘 못 키워서 미안하구나"라는 '욘두'의 말 한 마디가 모든 걸 함축한다. 전편부터 서로 애증의 관계를 형성하며 죽일듯이 치고박고 싸웠던 스타로드와 욘두는 이 작품에서 서로에 대한 부자간 사랑을 확인한다.

절대적 힘을 가진 제우스 같은 존재, 친아버지 에고의 존재는 그래서 중요하다. 일종의 가족 멜로드라마처럼 진행되는 영화의 서사는 스타로드가 친부와 양부(욘두) 중 누구를 선택하느냐에 대한 이야기로 봐도 무방하다. 그리고 스타로드는 결정적 순간 에고에게 일격을 가하고 욘두를 진정한 아버지로 받아들인다. 이는 꽤 상징적이다. 기존의 할리우드 서사라면 버림받고 고생한 아이가 그에 따른 합당한 보상(친부모와의 재회)을 받는 게 당연한데, 영화는 쿨하게 이를 걷어찬다. 지금의 세계에서는 '권위'나 '재물'보다 더 중요하게 부각되는 것이 사람과 사람간의 '정'이고 '관계'이다.

"욘두도 핫셀호프처럼 모험을 사랑했어. 그래, 우리 아버지는 정말 데이빗 핫셀호프였던거야.."라는 스타로드의 말은 주류에 편입되지 않는 아웃사이더 정신을 내포한다.

 

 

© 2017 Alcon Entertainment, LLC. All Rights Reserved.

 

 

마지막으로 <블레이드러너 2049>.

리들리 스콧 감독의 전설적인 SF <블레이드 러너>(1982)의 후속편인 이 작품은 전편만큼 심오하고 철학적인 주제로 관객들을 이끌어간다. 촬영과 프로덕션 디자인을 비롯한 기술적인 측면에서도 최상의 품질을 자랑하지만, 더 들여다봐야 할 것은 이 작품이 어떻게 주인공을 소비하는가다.

리플리컨트 사냥꾼인 'K'는 복제 인간이다. 그는 맡은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의심하게 된다. '나는 기계인가 인간인가.' 영화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K의 여정이다. 자기 자신이 혹시 인간일지도(특별한 존재 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K는 곧 우리의 모습과 진배없다.

하지만 후반부의 핵심인 전작의 주인공 데커드와의 만남 시퀀스는 관객이 예상하는 방향과 다르게 흘러간다.

보통의 영화들이었으면 데커드와 K의 부자 관계를 확인하고, K의 끊어진 혈통을 복원시켰을 테지만 이 작품은 다르다. 슬프게도 그는 데커드의 아들이 아니며 인간도 아니다. 그걸 깨달은 K의 이후 행동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죽음을 각오하고 스스로 희생하는 길을 가는 것'을 통해 가장 인간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사실상 자신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데커드와 그의 딸을 재회시키고 평온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K의 마지막 모습을 보면, 측은함과 안타까움을 넘어서 숭고함마저 느껴진다.

 

 

핵심은 이것이다. 이 세계에서 더 이상 '스페셜 원'은 중요치 않다는 것.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무대위의 주인공뿐만 아니라 사회를 구성하는 개개인 각자가 이 세계의 주인공이라는 것. 그들의 보이지 않는 노력과 분투가 합해져서 세상은 진보한다.

민주주의의 지상 천국 '미국'에서 할 수 있는, 이만큼 더 민주적이고 평등지향적인 스토리텔링이 또 있을까?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