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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이 연소되는 광경을 본 적 있는가?

악이 제멋대로 세상을 농락하면서 사람들을 괴롭히는 걸 보는 것도 충분히 괴롭지만 악이 최후를 맞이하면서까지 그 본성을 잃지 않고 발악할 때, 정말로 몸서리치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다.

 

일본도(刀)를 손에 쥔 채 광기에 빠진 장교로 형상화되는 '제국주의'가 불에 탈 때, 폭격으로 군인과 민간인들이 아비규환에 빠질 때, 영화는 진정한 지옥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계급의 문제

 

6-70년대 한국영화의 거장 김수용 감독의 말에 의하면, '김기영'의 작품은 대체로 하층 계급 여성과 상층 계급 남성의 갈등과 성적긴장을 다루고 있다.

이 작품 역시 '계급'에 따른 갈등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학도병인 주인공 '아로운'(김운하 분)과 고참병인 '모리'(이예춘 분)의 관계가 대표적이다.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듯, 일본인 모리는 속칭 조센징인 아로운을 틈만 나면 괴롭히고 상습적으로 구타한다.

처음 만날 때 부터 아로운을 미친 개 취급하며 자신의 군화에 묻은 인분까지 혀로 핥게 만든다.

흥미로운 건, 모리 역시 자신보다 계급이 높은 장교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고 무시당한다는 것이다.

권력의 피라미드 안에서 폭력은 악순환된다.

 

 

 

일본 여인 히데코

 

영화에서 가장 전복적인 캐릭터는 역시 '히데코'(공미도리 분)다. 계급관계로 따지면 조선인 학도병인 아로운보다도 더 아래에 있다고 볼 수 있는 히데코는 "여자의 눈물로서 주인공이 받은 고통을 치유"해준다.

같은 일본 국적의 남성들이 자행한 폭력으로 상처받은 조선인 남성을, 일본 여성이 위로해주고 사랑한다는 이 아이러니.

히데코 자신조차도 둘의 관계가 사랑인지 위안인지 확신하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히데코는 그 스스로가 시대상황에 당당히 맞서는 주체적 인물이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조선인과의 반대하고 멸시하는 상황에서도 그녀는 "부끄러운 건 인정이 아니라 인격"이라며 자신의 사랑을 정당화한다. 둘 만 있을 때 아로운이 주저하고 머뭇거릴 때도, 일본인이나 조선인이나 모두 같다며(언어, 풍속, 사상, 조상 등) 진보적인 생각을 거침없이 토해낸다.

사랑의 경쟁자(?)인 아로운의 조선인 제자 경희가 왔을때도, 위축되지 않고 먼저 대담하게 아로운의 방으로 찾아간다.

 

 

 

감독 김기영

 

'욕망의 지휘자', 거장 김기영은 전작 <하녀>(1960)에 이어 이 작품에서도 영화 속에 자신의 인장을 새겨넣었다.

외견상으로는 분명한 전쟁 영화, 멜로드라마 장르라고 볼 수 있지만 '금기의 남녀 관계'를 다룬다는 점에서 김기영 평생의 테마와 일맥상통한다.

보통의 전쟁 영화들이 야외를 배경으로 쏟아지는 포격과 총탄 속 군인들의 처절함과 전우애를 보여주는데 반해 이 영화는 한정된 공간 속에서 인물들의 내밀한 감정을 표현하는데 집중한다.

좁은 '막사' 안에서 이해관계가 다른 인물들이 서로 날을 세우는 장면들이 인상적이다. 극 중 조선 학도병 및 미군들이 수감되는 '감옥' 역시 폐쇄 공간 속 인물의 심리를 보여주는데 일조한다.

일본군 장교의 집무실에서 강요에 의해 서로 얼굴을 맞대는 히데코와 아로운의 모습은 감독의 연극적 연출이 돋보이는 장면이다.

아로운이 잘보이기 위해서 히데코 집에 보내는 '복숭아 상자'도 성적인 측면에서 의미심장하다. 히데코는 밥 대신 복숭아만 먹는다. 최근 개봉한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2017)에서도 주요 소재로 쓰인 것처럼, 복숭아는 성적 함의가 있는 과일이다.

 

 

 

히데코의 엄마는죽으면서 "일본은 진다. 난 그게 싫다"라고 일갈한다.

일본군 장교는 불에 타 죽으면서 일본 군국주의의 민낯을 보여준다.

죽기 직전에 가까스로 살아남은 아로운의 모습은, 지옥의 불구덩이 속에서 기어나온 것 같은 강렬한 이미지를 선사한다. 마치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지옥의 묵시록>(1979) 속 윌라드 대위처럼. (수증기 서린 강물 속에서 서서히 머리를 드러내는 그 유명한 장면) 둘의 공통점은 '심연'을 체험하고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는 점이다.

 

살아남은 연인은 전쟁을 뒤로 하고 '다음 세대를 창조'해낼 것이다.

검댕으로 더럽혀진 아로운의 얼굴은 곧 그을린 제국주의를 상징하고, 김기영은 영화를 통해 대동아공영이라는 헛된 망상(욕망)에 빠진 일본의 초상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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