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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영

<고려장> (1963)

JGH 2018. 4. 16. 00:18

https://www.kmdb.or.kr/db/kor/detail/movie/K/00842/own/image#dataHashStillDetail18

 

 

 

 

 

"열 형제는 후처가 데려온 배 다른 동생의 손에 모조리 죽을 것이다."

 

마을을 정신적으로 지배하는 무당이 극 초반에 내린 이 살벌한 예언·저주는 이후 영화 속 인물들에게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치게 된다.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이 있다. 이는 동서고금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맥베스] 역시 세 마녀의 예언이 한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잘 보여준다. "맥베스 만세, 장차 왕이 되실 분 만세"라는 한마디가 주술적인 힘으로 맥베스의 숨어있던 욕망을 부채질한 것 처럼, <고려장>의 무당 역시 자신의 권위에 따른 발화로 영화 속 인물들의 행위를 촉발시킨다.

 

 

 

현실의 지옥도

 

대부분의 장면을 정교하게 디자인된 세트에서 촬영한 이 영화는 시대가 불분명한 어느 산골 마을을 배경으로 우리 민족이 지난하게 겪어왔던 '지옥'을 그려낸다.

"배부른 게 죄가 되는 세상"이라는 대사가 설명하듯 가난과 기아가 시종일관 인물들을 옥죈다. 흉년 때문에 제대로 된 식사는 고사하고 물도 한 모금 마실 수 없는 세상, 자식들이 부담을 덜기 위해 아버지를 버리는 상황, 감자 한 알 때문에 손주가 조부모를 구타하는 말세다.

주인공 구룡(김진규 분)역시 자신과 어머니(주증녀 분)를 위해, 사람들의 굶주림을 이용해서 땅을 사들인다.

이복 형제들(열 형제)로 인해 절름발이가 된 그는 세상에 대한 복수심과 뿌리깊은 열등감으로 인해 악착같이 농사를 지어 재산을 모은다. 하지만 첫사랑인 '간난'(김보애 분)은 그를 외면하고, 새색시로 맞이한 여자는 '벙어리'라는 결함 때문에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 

 

 

 

여자의 운명

 

어렵게 결혼했지만 그 생활도 곧 비극으로 끝난다.

흑심을 품고 있던 이복 형제 셋에게 아내가 겁탈당하고, 그녀의 복수로 한 명이 죽게 된다. 이를 알게 된 형제들이 와서 따지고 들자 구룡은 아내에게 자결을 권하고, 따르지 않자 직접 죽이고 만다. 이 부분은 셰익스피어의 잔혹한 초기 희곡 [타이터스 앤드로니커스]를 연상시킨다(이 작품 속 러비니아는 강간당하고 증거인멸을 위해 혀와 두 팔을 절단당한다). 남성 욕망의 포로가 된 힘없는 여성들은 폭력과 사회의 냉담한 시선 속에서 희생된다.

김기영의 다른 영화들이 그런 것처럼 <고려장>에도 기구한 여성들의 삶이 그려져 있다.

억울하고 부당한 현실 속에서 그들이 들을 수 있는 위로는 고작 '참아라', '팔자다' 같은 말 뿐이다. "계집이란 평생 배부를 때가 없다"는 구룡 어머니의 말, "누가 내 몸뚱아리라도 사줬으면"하는 간난의 호소는 지옥 같은 세상, 그 안에서도 절대적으로 '을'이 될 수 밖에 없는 여자의 운명을 보여준다.

가족들을 먹여 살릴 감자를 받기 위해 스스로 민며느리가 되는 어린 '연이'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아버지 뻘인 구룡의 집으로 자진해서 들어가는 이 맹랑한 아이는 종국엔 가뭄 해결을 위해 마을의 제물로 바쳐지는 신세가 된다.

 

 

 

점증되는 긴장감

 

구룡은 효도와 '번식(핏줄기)' 사이에서 갈등한다. 구룡의 어머니는 구룡이 돌아온 간난과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고 간난의 자식들을 거둬들여 함께 살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 선행되어야 할 조건은,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풍습에 맞게 자신이 산 속으로 가는 것(고려장 되는 것)이다. 효자인 구룡은 당연히 이를 계속 거부한다. 

하지만 열 형제의 음모로 구룡과 간난이 마녀 사냥의 희생자가 되고, 구룡은 울며 겨자먹기로 어머니를 고려장해야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 때부터 감독 김기영의 장기가 발휘되기 시작한다. 하이라이트에 하이라이트가 이어지며 로컬 스릴러로서의 긴장감이 증폭된다. 일반적인 영화라면 고려장 시퀀스를 끝으로 영화를 마무리했겠지만, 이 작품은 이후에도 반전에 반전이 이어지며(복수 시퀀스) 관객의 허를 찌른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고려장'의 주무대가 되는 영화 속 세트는 무척 을씨년스럽다. 널려 있는 해골들, 배경의 짙은 안개, 귀곡성 같은 음향효과 덕택에 흡사 공포영화 같은 분위기가 조성된다. 그보다 더 공포스러운 건 인간 내면의 욕망을 가감없이 보여주는 어머니의 모습이다. 노모는 자신의 죽음으로 아들이 편히 살기를 바라지만, 막상 그 상황에 닥치자 두려움을 이기지 못한다. 미련 없이 죽고자 하는 의지와 원초적 생존 욕구 사이의 갈등. 인간의 이런 이중성은 명배우 주증녀에 의해 제대로 표현된다.  

결국 모자는 피눈물을 흘리며 서로 작별하고, 어머니의 기도로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약속과 달리 열 형제는 간난을 목매달아 죽이고 곧이어 피의 복수가 시작된다.

 

 

 

쓰러져야 할 고목

 

무려 1대 9의 싸움이지만 구룡은 지지 않는다. 아니, 질 수가 없다. 그의 뒤에는 무당의 예언이 후광처럼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무당은 "꼭 이긴다. 신령님이 네 원수를 갚아줄 거다"라고 살인을 부채질하기까지 한다) 이 장면은 마치 구로사와 아키라의 액션 영화를 방불케 하는 박진감으로 찍혔다. 도끼 하나로 적들을 차례차례 제압하는 구룡의 모습은 세상 끝에 선 사무라이의 결연함을 닮아 있다. 이후 구룡은 내쳐 달려 마을 어귀의 고목나무와 무당까지 제거해버린다.

맥베스의 예언은 실현됐지만 김기영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애초에 감독은 부조리와 적폐로 인물들에게 고통을 주는 시스템을 묵과하고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반 만년 간 한민족이 겪은 모든 '인습·구습·전근대'의 상징인 무속 신앙은 없어져야만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나쁜 게 아니야"라는 열 형제 중 하나의 외침은 본질적으로 거짓이 아니다. 진짜 문제는 그들이 아니라 무당과 고려장으로 대표되는 구 사회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남은 아이들과 함께 '씨를 뿌리러' 가는 구룡의 마지막 모습은 근대를 향한 일말의 희망을 남긴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걸작 <라쇼몽>(1950)의 마지막이 갓난 아이를 통해 미래를 그렸던 것처럼, <고려장>은 지독한 고통과 죽음을 거쳐 새 생명, 곧 '삶'에 당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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