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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영

<바보 사냥> (1984)

JGH 2018. 4. 12. 02:31

https://movie.naver.com/movie/bi/mi/photoView.nhn?code=20945

 

 

 

 

 

가히 좋은 의미에서 괴작이라 할 만하다.

외화 수입쿼터를 위해 영화사에서 부실하게 지원하여 급조하듯 완성된 <바보 사냥>은, 기술적으로는 미완에 가깝지만 김기영의 영화답게 컬트적인 느낌을 물씬 풍기는 수작이다.

 

 

공해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차 사고를 당해 정신병원에서 1년 만에 깨어나는 광식(배규빈 분)은 '공해'에 유독 민감하다. 그는 과학으로 인해 자연계가 곧 멸종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생태계는 저절로 개체수를 조절하며 균형을 회복해야 하는데 지금 이 지구상에는 너무 많은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 대기오염, 산소부족, 지하자원의 고갈, 자연생물의 멸종, 대량 원폭 생산, 식량부족으로 오는 집단 아사 등이 그가 생각하는 인류의 암울한 미래다.

일견 황당무계한 이 생각에 동조하는 한 사람이 있는데, 같은 병실을 쓰게 된 '홍익'(김병학 분)이다. '자살 고위험군'인 그는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는 성향이다.

이 두명의 아웃사이더가 남쪽의 토끼섬(이상향)을 목표로 병원을 탈출해 여정을 떠난다.

 

 

 

블랙코미디

 

이후 그들의 행적은 에피소드별로 해프닝처럼 펼쳐진다.

63빌딩 앞 참새구이, 소 마사지, 약장수, 팝콘 장사등 여러 일들을 전전하는데,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모두 때려치우고 만다. 일반적인 사람들의 시선으로는 '미쳤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그들은, 쉽게 융화되지 못하는 성격과 사상때문에 쫓기듯 도시에서 멀어져간다.

결국 그들이 당도하는 곳은 세상의 끝, 탄광이다. 이곳은 말 그대로 천국(돈)과 지옥(죽음)이 병존하는 곳이다. 주류 사회에서 멀어진 청년들이 갈 곳은 사고의 위험이 도사리는 '막장'뿐이다.

영화는 엉뚱하고 우스우며 충동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는 '바보 청년'들을 통해 80년대의 이촌향도(젊은이들이 농촌에서 도시로 일자리를 찾아 이주하는 현상)를 풍자한다.

작업 반장의 딸 '석호'(엄심정 분)를 만난 후 땅끝 어촌으로 가는 와중에 사기 행각(차력쇼, 가짜 유괴)을 통해 돈을 벌게 되는데, 이도 유머러스하게 표현되어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상적인 방법을 통해 돈을 벌기 어려운 이들이 할 수 있는 선택이 범죄밖에 없다는 점에서 마냥 웃을 수 만은 없는 씁쓸함이 있다.

 

 

 

석호의 존재

 

탄광 시퀀스 이후부터 영화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되는 여인 석호는 기이한 매력을 가진 인물이다. 두 남자와의 실없는 대화, 의미를 알 수 없는 몸동작으로 웃음을 준다. 그러면서 결정적인 상황에서는 연약한 면, 여성적인(육체적인) 면을 통해 남자들을 교란한다. <하녀>같은 기존의 김기영 영화가 한 남자와 두 명의 여자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던 반면, 이 작품은 '한 여자와 두 남자' 구도를 가지고 있다. 세 사람은 소위 나사가 빠진 사람들이지만 그 중 가장 현실감각이 있는 사람은 석호다. 토끼섬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돈을 마련하는 것도 그녀고("돈은 상대방의 약점을 쥐지 않으면 못 벌어" / "여자가 경제권을 잃으면 볼품없게 되는 군"), 정신병원 관계자를 만나고 나서 모두의 계획을 전면 수정하는 사람도 그녀다. 결정적으로, '인간은 곧 동물이다' 라는 감독의 명제를 가장 충실하게 표현하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자신을 업신여기고 때리기까지 했던 '광식'을 향한 살의가 성적 욕망으로 돌변할 때 그 모습이 가장 잘 드러난다. 이 행동은 뻣뻣한 정신이상자였던 광식까지 변화시킨다.

 

 

 

<바보 사냥>에는 한마디로 정의내릴 수 없는 불균질함이 존재한다.

장르적으로는 블랙코미디지만 간혹 비극적인, 서글픈 분위기도 엿보인다.

또 이장호나 배창호같은 감독이 주도했던 80년대의 사회파 영화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김기영만의 인장이 가득하다.

하이라이트 정사 신은 그중 백미다. 이전까지의 사실주의 톤에서 벗어난 이 장면은 내용상으로도 반전의 충격을 준다. 꼿꼿하던 주인공을 무너뜨리는 건, 결국 하찮게 생각했던 인간의 욕망(감정)이다.

 

두 그룹으로 인물들이 나뉜 결말의 의미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한 그룹은 대안가족을 이뤄 목적지인 유토피아로 떠났고, 한 그룹은 육지쪽으로 도피하듯 떠났다. 육욕을 이기지 못한 남-녀 한 쌍이 다시 타락한 세상속으로 가는 모습에선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가 느껴진다.

감독 김기영이 보기에 작금의 현실에서 유토피아로 가는 티켓을 거머쥘 수 있는 사람은, '착하기만 한 바보'와 '생에 더이상 미련이 없는 노부부'정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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