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https://www.imdb.com/title/tt4925292/mediaviewer/rm1907841536

 

 

 

 

 

1년 동안의 '걸 후드'.

김혜리 평론가가 남긴 이 한 줄 평은 <레이디 버드>의 내용과 형식을 모두 아우른다는 점에서 적확하다. 영화는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보이 후드>(2014)처럼 삶의 한 단면을 시간이 흘러가듯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특징 없어 보이기도 한. 좋은 의미에서의 '강렬함'이 실종되어 있다.

해외 현지 언론을 포함하여 국내 평단과 관객들 대부분이 이 준수한 페미니즘 성장 영화의 등장에 찬사를 보내고 있지만, <레이디 버드>는 장점만큼 단점도 두드러지는 영화다.

 

 

 

흐르는 강물처럼

 

영화에는 별다른 사건이 등장하지 않는다. 대학 진학을 앞둔 크리스틴 '레이디 버드' 맥피어슨(시얼샤 로넌 분)이라는 학생이 가톨릭 학교 졸업반 재학 중에 겪는 1년 간일들을 담담히 그려나갈 뿐이다.

여기엔 보는 관객들이 동일시하고 공감할 만한 작지만 소소한 일상들이 등장한다. 가족과의 갈등, 친한 친구와의 장난, 학내 뮤지컬 참여와 공연, 생애 첫 연애와 키스 등.

시간예술인 영화는 흐르는 강물처럼 스크린 위의 이미지들을 퇴적(堆積)하고, 그 퇴적층은 관객 각자에게 유의미하게 작용한다. <레이디 버드> 역시 개별적인 장면들이 모이고 쌓여서 성장통이라는 하나의 의미망을 형성하고, 그것은 곧 보편적인 감정(청소년기의 아픔·혼란·환희·즐거움 등)을 불러일으킨다.

영화 속 뮤지컬 지도 교사인 르비아치 신부는 연기 교습을 하며 '진실한 게 가장 중요한 거야'라고 아이들에게 말하는데, 이는 곧 감독인 그레타 거윅의 신조와도 일맹상통한다. 자극적인 소재나 설정의 삽입 대신 있는 그대로의 나날들을 보여줌으로써 영화는 보편성을 획득한다.

 

 

 

모녀 관계를 다루는 영화?

 

언론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그레타 거윅 감독이 가장 강조했던 <레이디 버드>의 핵심 포인트는 '모녀 관계'였다.

제 90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나란히 후보로 올랐던 시얼샤 로넌과 로리 멧칼프(매리언 맥피어슨 역)는 좋은 호흡을 보여준다. 오프닝 대화 신에서 사소한 말싸움 끝에 차에서 뛰어내리는 레이디 버드의 모습, 대학 진학 문제를 두고 아빠(트레이시 레츠 분)를 사이에 두고 반목하는 장면, 무심하게 공항에서 이별하지만 이내 울음을 참지 못하는 엄마의 얼굴 등 모녀가 등장하는 신들은 짙은 인상을 남긴다. 하지만 감독이 강조한 만큼("제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이 영화의 주요 관계가 모녀 관계라는 거예요. 이게 제 작품의 출발점이 됐습니다.") 모녀간의 드라마가 영화의 전면에 부각된 것 같지는 않다.

일단 엄마 캐릭터가 등장하는 신 자체가 그리 많지 않고(20 신 안팎), 가족 캐릭터들 역시 엄마 위주라기보다는 아빠와 오빠를 비롯한 인물 전체에게 비중이 분산되어 있다.

한마디로 말해, 레이디 버드를 제외한 가족과 친지 전체가 하나로 뭉뚱그려져 그녀의 '외부 세계'를 이루고 있다.

엄마의 눈물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사람 좋아 보이는 아빠의 '우울증'이고, 히피 스타일 오빠의 '실업' 문제이다. 레이디 버드가 엄마와 쇼핑하고 다투는 사소한 일들보다 더 중요한 건 'We are not rich'('우리는 부자가 아니야')라고 지나가듯 나오는 극 중 대사다. 뉴욕의 명문인 컬럼비아 대학교에 진학할 수도 있는 딸 때문에 전정긍긍하며 학비지원금을 마련하려 애쓰는 부모의 모습 역시 중요하게 부각된다.

그러므로 영화를 단순히 모녀 관계에만 집중해서 보 것은 좁은 해석이다. 그보다는 개인과 세계의 갈등, 그리고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가족간의 애증 관계와 사랑에 더 초점을 맞춰서 봐야 한다. 그렇게 볼 때에 영화가 더 흥미로워진다.

 

 

 

영화적 흥분의 문제

 

우리는 좋은 영화를 보며 전율한다. 전율한다는 건 신체의 신경 세포가 영화에 반응한다는 것이고, 이것은 곧 아드레날린 호르몬이 분비된다는 뜻이다.

이런 영화적 흥분을 자아내는 가장 큰 요소는 결국 영화의 '리듬'이다. <레이디 버드>는 좋은 내용을 가지고 있지만 영화적 리듬이 훌륭하다고는 볼 수 없는 영화다.

<레이디 버드>의 편집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생략'이다. 영화는 한 박자 빠른 편집을 통해 다음 장면으로 점프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준다. 게이인 첫 남자친구 대니를 다독여줄 때, 카일과 첫 경험을 할 때, 가장 친한 친구인 줄리와 극적으로 화해할 때 등 중요한 장면들에서 영화는 갑자기 다음 신으로 넘어간다. 일견 자연스럽고 덤덤한 서사의 진행(레이디 버드 캐릭터의 성격과 유사한)처럼 보이지만, 행위에서 '이후'가 없다는 건 여운을 느낄 여지가 없다는 것이고 결국 감정적 흐름을 차단한다. 단편적으로만 나열되어 있는 이런 에피소드들은 강약 조절이 부재하기 때문에 '리듬'을 형성하지 못한다.

이는 노아 바움백과 그레타 거윅이 함께했던 뉴욕 배경 영화들(<프란시스 하>, <미스트리스 아메리카)의 나른함을 연상시킨다. 사건은 없고 일상만 있는 이런 분위기는 또한 김혜리 평론가가 명명한 '캘리포니아 여피 무비'(미란다 줄라이, 마이크 밀스 영화들)를 떠올리게도 한다. 소위 '자기 배꼽만을 응시하는' 이런 류의 영화는 개인적인 근심을 세계의 중대한 문제와 등가로 놓는다. (영화 속에서 레이디 버드는 당시 벌어지고 있던 이라크 전쟁 소식에 심드렁해 한다)

물론 인간 개개인은 자기 삶의 주인공이고 누구도 각자의 문제에 대해서 함부로 말할 권리는 없지만, 극 중 레이디 버드 캐릭터는 누군가로부터 소위 '배부른 소리 한다'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을 것 같은 모습이다. 비록 경제적으로는 중하류층에 속할지라도 최소한 자신의 꿈을 펼칠 기회 정도는 주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영화 내내 고향인 새크라멘토(캘리포니아 주)가 지루하다고 푸념하지만, 누군가에겐 자본주의의 성지 '미국' 안에서도 가장 화려하고 낭만적인 곳이 될 수 있다.

 

 

 

결과적으로 <레이디 버드>는, 극장을 찾아 돈을 내고 영화를 직접 본 사람 대부분에게는 어느 정도의 정서적 울림과 만족을 주는 작품이다.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유년시절의 부끄럽고 아름다웠던 순간들을 다시 느낄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영화 '선택'의 과정에서는 호불호가 나뉠 만한 영화다. 전형적인 할리우드 장르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이 영화를 선택하지 않을 것이고, 반면에 독립 영화나 잔잔한 드라마를 선호하는 사람들은 보기도 전에 이미 호감을 가지고 티켓을 끊을 것이라는 뜻이다.

전자의 입장, 또 세간의 호평 일색 여론을 감안했을 때 <레이디 버드>는 영화 내적인 완성도에 있어서 일말의 아쉬움을 남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