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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imdb.com/title/tt5776858/mediaviewer/rm3014220544

 

 

 

 

결론부터 말해서 <팬텀 스레드>는 주체가 분열에서 죽음으로 이행하는 영화다. 여기엔 깊은 실존적 고민이 담겨 있다.

감독 폴 토머스 앤더슨의 영화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화해·치유·미래의 테마를 다뤘던 <매그놀리아>, <펀치 드렁크 러브>와 분열의 테마를 다루는 <부기 나이트>, <데어 윌 비 블러드>, <마스터>. 앤더슨은 2000년대 후반부터 후자에 좀 더 집중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고 <팬텀 스레드>역시 이 카테고리에 해당한다.

초기작들이 가족과 그 구성원들의 관계를 깊이 있게 탐구했다면, 최근작들은 인간의 심리와 병적인 열정좀 더 천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1950년대 영국의 저명한 의상 디자이너인 레이널즈(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자신만의 법칙이 통용되는 세계 속에서 살고 있다. 정확히 정해진 스케줄, 매일 만나는 같은 사람들과 반복되는 재봉 일 등등. 그는 한마디로 '까다로운 사람'이다.

그런 그의 삶에 조그만 균열을 내는 '알마'가 우연히 등장하게 되고, 레이널즈는 사랑과 혼란스러움의 양가적인 감정 사이에서 동요한다.

 

레이널즈는 정신분석학적으로 봤을 때 흥미로운 인물이다.

유년시절 겪었던 '엄마의 재혼'이라는 사건이 평생 그를 옥죄는 상흔이 되어 남아 있다.

엄마와의 불안정 애착이 형성된 레이널즈는 그 이후의 생애 과정에서 다른 여성들과의 관계 역시 불안정하게 이어갈 수 밖에 없다. 프로이트의 심리 성적 발달 이론에 따른다면 5단계인 생식기에서 고착된 상태다. 이 시기의 고착은 곧 성관계의 어려움으로 연결된다. (그는 여자들과 친밀한 관계만 유지할 뿐 결혼이나 가정을 꾸리는 일까지는 이어가지 못한다) 그는 엄마라는 '유령'으로 인해 저주받았다고 느끼기 때문에 자신을 포함한 주변을 강박적으로 수놓는다. 떠나는 엄마에게 웨딩드레스를 손수 만들어 준 경험이 있는 레이널즈는 일생을 드레스 디자이너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한편 레이널즈를 옥죄고 있는 현실속의 인물은 친누나 시릴(레슬리 맨빌)이다. 레이널즈의 의상실 겸 집에서 매니저 역할을 수행하는 그녀는 동생을 다방면으로 챙기는 듯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늘 자신의 통제 안에 가두려 한다.

시릴은 동생과의 말다툼 중에 "나와 싸우면 넌 살아남지 못해. 바닥에 쓰러져 뒹구는 건 너야." 라며 레이널즈를 굴복시킨다. 이 장면은 강고하게 믿어왔던 레이널즈의 세계가 무너지는 첫 번째 순간이다. 독재자에 가깝게 자신의 의상실을 지배해왔던 레이널즈는 작심하고 독설하는 누나의 공격에 저항하지 못한다. 이후 레이널즈는 유일하게 자신을 온전히 이해해주는 알마의 품 안에서 유약한 어린아이가 된다. 그는 옷이라는 기표에 자신을 묶어버린, 영혼이 비어있는 남자다. 자신을 망치러 온 구원자 알마가 해주는 '독버섯 요리'를 자진해서 먹는 레이널즈의 심리를 따라가고 이해하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알마의 존재는 저주로 얼룩진 그의 삶을 풀어줄 열쇠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내용뿐만 아니라 기술적으로도 훌륭하다. 필름 카메라를 통해 1.85:1 화면 비율로 찍힌 영화는 보는 내내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앤더슨은 그동안 함께 했던 촬영감독 로버트 엘스윗이 스케줄 문제로 함께하지 못하게 되자 따로 촬영감독을 두지 않은 채 영화를 진행했다. 카메라 오퍼레이터만 있었을 뿐, 촬영·조명등의 설계는 모두 그의 몫이었다. 디지털 촬영이 난무하는 요즘 영화들 속에서 필름 룩품격있는 화면을 구현하는 흔치 않은 영화다.

제 90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의상상을 수상한 마크 브리지스의 우아한 의상, 아카데미 후보에 올랐던 조니 그린우드의 유려한 클래식 스타일 음악 역시 50년대 영국 상류층의 분위기를 구현하는데 일조한다.

 

약간 엉뚱하지만, 이 작품은 대니 드비토의 1989년 작 <장미의 전쟁>을 떠올리게 한다. 과격한 결혼 코미디인 이 영화와 <팬텀 스레드>는 의외로 공통점이 있다. 두 영화 모두 '전쟁 같은 사랑'을 행하는 남녀를 전면에 배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FM대로 사는 남자와 주체 의식이 강한 여자는 늘상 대립한다. "당신은 뭐든지 다 알죠"라고 말하는 <장미의 전쟁> 바바라(캐슬린 터너)의 말처럼, 그녀들은 맨스플레인(어느 분야에 대해 여성들은 잘 모를 것이라는 기본 전제를 가진 남성들이 무턱대고 아는 척 설명하려고 하는 행위)에 저항하고 구속을 거부한다. 결과적으로, 죽음까지 치닫는 부부싸움 끝에 그들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다.

 

폴 토마스 앤더슨은 전작들에서 분열적이었던 주인공들을 거쳐 <팬텀 스레드>에서는 유사 죽음에 이르는 인물을 보여준다. 자아와 세계가 타협하지 못한다면 다음 단계는 곧 죽음이다. 역설적인 건 이 죽음이 육체적 죽음이기도 하지만 인물과 세계의 '화해'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레이널즈의 선택은 온전한 자살 시도라고 볼 수 없다. 그는 반복해서 죽음을 능동적으로 '선택'한다. 자신이 독버섯을 먹고 약해져야만 타인과의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완고한 자신만의 성을 지키고 싶고, 또 반대로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 활기와 살아있는 감정을 원하기도 한다. 이 양가적인 욕구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다가 영화는 끝이 난다. 결국 알마와의 결합은 저주에서의 해방이 아니며 그는 영원히 분열된 상태 그 자체로 살아가야 할 운명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영화를 보는 우리 역시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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