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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2018 CGV 아트하우스, 파인하우스필름, 나우필름






'헌데 난 그런 소릴 들을 때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더란 말입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도대체 사람의 운명이란 것이 얼마나 불공평한 것이겠습니까.' ([운명에 관하여])



이상문학상에 입상한 이창동 작가의 단편 소설 [운명에 관하여](1987)의 주인공 김흥남은 기구한 삶을 살아가는 인물이다. 전쟁 고아인 그는 성장하면서 밑바닥 인생을 전전한다. '재벌의 외동아들로 돈방석에 싸여 태어나는 팔자 좋은 인간이 있는가하면, 자기를 낳아준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고 제 이름 석 자도 알지 못한 채 길바닥에 버려지는 인간도 있지 않습니까'라고 한탄하는 그는 '언제나 희망의 빛이 어렴풋이 보일 것 같은 순간이면 어김없이 암흑의 장막이 눈앞을 가로막는 인생'을 살아간다.

인간이라면 겪게 되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다룬 이 소설에서의 문제의식은 작가가 영화 감독으로 데뷔한 이후의 작품들에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버닝>은 이창동의 영화 세계에서 하나의 분기점으로 봐도 좋을 만한 작품이다. <초록물고기>, <박하사탕>을 1장으로, <오아시스>, <밀양>, <시>를 2장으로 본다면 <버닝>부터  다시 새로운 장이 열린다고 볼 수 있다. 1장은 견고한 사회 시스템 속 개인의 갈등을, 2장은 힘 센 운명과 미약한 인간의 대결을 다룬다. 그에 반해 <버닝>은 모호함과 장르적 성향이 두드러지는 영화다. 시나리오 구조적 완결성보다는 분위기와 상징에 더 힘을 쏟고 있다.

   


메타포의 나열


인공 종수(유아인)가 벤(연상엽)과 함께 나누는 대화들은 영화가 다루고자 하는 바를 간접적으로 말해준다. 해미(전종서)가 아프리카에서 만나 데려온 수수께끼의 인물 벤은 '메타포'를 언급한다. 문예창작과를 졸업한 작가 지망생인 종수에겐 익숙한 개념일 메타포(은유)는 벤의 말하기 방식 자체를 의미하기도 하고, <버닝>이라는 영화가 선택한 영화적 스타일이기도 하다. <버닝>은 사실상 '원관념이 존재하지 않는 메타포들의 나열'이라고 봐도 손색이 없다. 

영화 속에서 여러 번 언급되는 '고양이'(보일이), '우물', '비닐하우스' 등은 그 실체를 명확히 파악할 수 없는 것들이다. 해미의 집에서 기르는 고양이는 '판토마임'을 좋아하는 해미가 만들어 낸 가상의 애완동물이면서, 종반부에 벤의 집에서 실제로 등장하기도 한다. 해미가 과거에 빠졌다고 언급한 우물 역시 주변 사람들(해미 가족, 고향 주민)의 증언에 따라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여겨지다가, 후반부에 종수 엄마에 의해 실제 장소로 재판명된다. 벤이 자신의 취미라고 언급한 비닐하우스 태우기 역시 영화 속에 직접적으로 제시되지 않는다. 종수의 꿈 속에서 활활 타오르는 어릴 적 비닐하우스, 불타는 벤의 포르쉐만이 유사 이미지로 제시될 뿐이다. 종수가 내내 의심했던 진짜 '비닐하우스 태우기(벤의 살인행위)'는 끝내 영화속에 등장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해미'라는 존재 역시 종수에겐 이해되지 않는 메타포일 뿐이다. 힘든 삶에 한줄기 빛처럼 찾아온 해미는 결국 자신과 처지가 크게 다르지 않은 임시직 행사 진행 모델이며, 카드빚 때문에 가족과도 연락을 끊고 언제든지 '연기처럼 사라지는 존재'일 뿐이다.



사회의식이 담긴 상징


반면에 상징으로서 뚜렷이 제시되는 몇 가지 소재들이 영화속엔 존재한다. 남산 타워 밑에 있는 해미의 원룸, 파주 시골에 있는 종수의 낡은 집, 송아지 한 마리가 있는 축사, 종수가 모는 오래된 트럭등은 명백히 감독이 그리고자 한 이 시대의 젊은이들을 의미한다. 반대로 강남에 있는 벤의 럭셔리한 집과 스포츠카는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또 다른 축의 젊은이들이다. 영화는 이렇게 흙수저(종수)와 금수저(벤)의 대비를 명징한 이미지로서 표현한다.

그리고 이 둘은 이창동 리얼리즘의 세계 안에서 같은 공간안에 존재하지만 결코 서로 섞일 수 없다. 벤과 그를 위시한 주변 친구들은 해미와 그 밖에 벤이 데려온 다른 여자들을 구경하는 걸 즐긴다. 그들에게 흙수저들은 그냥 '재미'로 같이 어울리는 존재일 뿐이다. 벤은 자신이 소유한 부를 통해 합법과 탈법의 경계를 넘나들며 재미를 추구한다. 그 재미란 해외에서 만난 젊고 가난한 여성을 애인으로 삼는다거나 대마초를 피운다거나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것이다. 종수는 벤과 해미를 따라 클럽에도 가보지만 적응하지 못한다. 바로 다음 장면에서 그는 축사 안의 배설물을 치우고 있다.

종수가 '개츠비'같다고 생각하는 벤은 '뭘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돈은 많은 수수께끼의 청년'([헛간을 태우다], 무라카미 하루키)이다. 벤과 그 부류들은 '개방적이고 천진난만한 단순함이 모종의 사람들을 매혹하는'([헛간을 태우다]) 해미같은 여자를 갖고 놀 뿐이다.

해미가 벤에 의해 실종되었다고 믿는 종수는 "진지하면 재미 없다"고 친근하게 충고하는 벤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수가 없다. 겉으로 명확하게 드러내놓고 표현하진 않지만, 종수는 벤과 상류층 모임을 혐오한다. 그들의 재미는 종수에겐 이해할 수 없는 악취미일 뿐이다. 



"세상이 수수께끼 같아요"


해미를 찾기 위해 벤을 쫓던 종수는 '세상이 수수께끼 같아서 어떤 소설을 써야 할지 모르겠다고' 실토한다. 그에겐 해미가 없어진 것도, 벤이라는 돈 많은 사람도, 분노 조절 장애로 인해 상해죄로 재판 받는 아버지도, 십 수년만에 나타난 엄마도 모두 미스테리일 뿐이다. 더 근본적으로는 '개츠비들이 너무 많은 한국 사회의 구조' 자체가 그에겐 넌센스다. 

자신이 생각하기엔 이 세계 자체가 거대한 모순이고 잘못인데, 세계는 아랑곳없이 태연하게 흘러간다. 타협하지 못하는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종수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1991)의 샤오쓰처럼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그것이 그가 내릴 수 있는 가장 실존적인 결단이다. 그는 마치 글을 쓰는 '작가'처럼, 스스로 이 미스테리 극의 결말을 맺는다.

영화 <버닝>에는 눈에 띄는 단점도 여럿 존재한다. 후반부에 명백히 장르적 진행을 표방하고 있지만 미스테리나 스릴로서의 긴장감이 떨어진다는 점, 전체적으로 대사가 많고 신이나 시퀀스의 길이가 길어서 자칫 지루해질 수 있다는 점, 배우들의 연기, 앙상블이 전작들에 비해 매끄럽지 못하다는 점 등.

그러나 러닝타임 동안 켜켜이 쌓인 '현실의 이미지들, 상징들'은 결국 감독이 의도한 어떤 의미, 주제를 형성해낸다.



극 초반, 해미는 종수와 만나서 정사를 하기 전 "이제 진실을 얘기해 봐"라고 말한다. 하지만 종수는 진실을 말할 능력이 없다. 진실을 판별할 수도 없다. 이 세상이 곧 하나의 거대한 미스테리인 것이다. 앞에서 벤이 말했던 '메타포(은유)'는 결국 '이 세상은 미스테리다'라는 한 문장으로 수렴된다. 여기서 원관념은 세상이고 보조관념은 미스테리다. <버닝>은 미스테리라는 장르 자체를 메타포로 사용하면서 현실의 모순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것이 지금 현재 이창동이라는 작가가 진보 예술가로서 대한민국과 그 속의 청춘들에 대해 논하는 나름의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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